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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리뷰 및 분석

영화 <파비안느에 관한 진실> 리뷰 : 기억과 거짓 사이, 가족의 진실을 묻다.

by lucet 2025. 7. 18.

영화 &lt;파비안느에 관한 진실&gt; 포스터. 밝은 햇살이 드는 창가 앞에 네 명의 가족이 앉아 있으며, 중앙에는 까뜨린 드뇌브가 단정한 모습으로 앉아 있다.

 

 

1. 영화 기본정보

  • 제목: 파비안느에 관한 진실 (La Vérité, 2019)
  • 감독: 고레에다 히로카즈
  • 장르: 드라마, 가족
  • 제작 국가: 프랑스
  • 상영 시간: 106분
  • 주연: 까뜨린 드뇌브, 줄리엣 비노쉬, 에단 호크
  • 개봉일: 2019년 10월 17일 (프랑스 기준)
  • 수상 및 상영: 제76회 베니스국제영화제 개막작 선정

2. 줄거리 요약

프랑스의 국민 배우이자 자아가 강한 노배우 ‘파비안느’는 자서전을 출간한다. 이를 계기로 딸 ‘뤼미르’는 미국에서 남편과 딸을 데리고 오랜만에 파비안느의 집을 방문한다. 그러나 뤼미르는 자서전 속에서 자신의 기억과 완전히 다른 이야기를 발견하고 혼란에 빠진다.

자서전 출간과 동시에 파비안느는 신비로운 분위기의 SF영화에 출연하게 되고, 촬영장에서의 경험은 그녀와 주변 인물들에게 감정의 균열을 불러온다. 뤼미르와 파비안느는 서로의 진심을 맞대기 시작하고, 그렇게 억눌러온 감정의 진실이 서서히 드러난다.


3. 주요 인물 소개 및 핵심 장면

● 파비안느(까뜨린 드뇌브)

프랑스 영화계를 대표하는 전설적인 배우. 감정 표현에 인색하고 자기중심적이지만, 노년기에 접어들면서 삶의 공허함과 모성에 대한 회한이 서서히 드러난다.

● 뤼미르(줄리엣 비노쉬)

파비안느의 딸이자 시나리오 작가. 어머니의 무관심과 일방적인 사랑에 대한 상처를 안고 살아왔다. 파비안느의 자서전이 계기가 되어 묵은 감정을 다시 꺼내게 된다.

● 행크(에단 호크)

뤼미르의 남편이자 미국 배우. 유쾌하고 따뜻한 성격으로 모녀 사이의 갈등을 중재하려 한다.

● 핵심 장면 : “자서전의 진실”

뤼미르가 자서전을 읽고 파비안느에게 질문을 던지는 장면은 영화의 중심축이다. “이건 사실이 아니야, 엄마”라는 뤼미르의 외침은 단순한 가족 갈등을 넘어, 기억과 진실, 그리고 삶의 해석에 대한 질문으로 확장된다.


4. 주제 분석 : 기억과 진실 사이의 균열을 응시하다

영화 <파비안느에 관한 진실>은 표면적으로는 한 노배우와 그의 딸 사이의 갈등과 화해를 그리는 가족 드라마처럼 보이지만, 그 내면에는 기억, 진실, 서사의 권력이라는 복잡한 층위가 교차되며 표현된다. 특히 고레에다 히로카즈 감독은 ‘자서전’이라는 형식을 통해 진실의 정체를 탐색하는 장치를 마련한다.

파비안느가 쓴 자서전은, 표면적으로는 한 배우의 인생을 되돌아보는 기록이지만, 실상은 그녀가 기억하고 싶은 방식으로 재구성된 이야기다. 그 안에는 감추고 싶은 과거가 삭제되고, 자신에게 유리한 감정만이 남아 있다. 뤼미르는 그 자서전 속에서 자신이 기억하는 어머니와는 전혀 다른 ‘배우로서의 파비안느’를 마주하고 혼란에 빠진다.

영화는 이러한 기억과 진실의 불일치를 통해 질문을 던진다. 우리가 믿는 진실은 실제로 일어난 일의 반영인가, 아니면 스스로에게 위안을 주기 위한 ‘편집된 이야기’인가? 파비안느는 자신의 삶을 무대처럼 연출하고, 자서전이라는 텍스트를 통해 그것을 영원히 고정하려 한다. 이 행위는 곧 기억을 소유하고 지배하려는 욕망이며, 타인의 감정은 그 서사에서 배제되기 쉽다.

고레에다는 이러한 서사를 통해, 가족이라는 가장 밀접한 관계 안에서도 진실은 늘 편향될 수 있다는 점을 조심스럽게 짚어낸다. 진실은 하나의 절댓값이 아니라, 각자의 입장에서 무수히 분화된 ‘상대적인 실체’ 일 수 있음을 영화는 이야기한다.


5. 스토리 속에서 찾은 철학적 질문 : “우리는 누구의 이야기 속에서 살아가고 있는가?”

<파비안느에 관한 진실>이 던지는 철학적 질문은 단순히 모녀의 갈등을 넘어서, 인간이 자신의 삶을 어떻게 기억하고, 어떻게 타인의 기억과 충돌하는지를 깊이 성찰하게 만든다.

파비안느는 스스로를 “성공한 배우, 가족을 사랑한 어머니”로 자서전 속에 그려낸다. 그러나 뤼미르에게 어머니는 냉정하고 거리감 있는 존재였고, 정작 중요한 순간에는 그녀 곁에 없었던 인물이었다. 이 둘 사이의 기억의 간극은 단순한 감정싸움이 아니라, ‘삶의 내러티브’를 누가 구성하는가에 대한 본질적인 질문으로 이어진다.

철학자 리쾨르는 “기억은 회상이 아니라 재구성”이라고 말했다. 영화는 바로 이 지점에서 멈추지 않고, 기억의 불완전성을 받아들이는 태도야말로 타인을 이해하는 첫걸음임을 제시한다. 우리는 언제나 자기중심적 기억에 기대어 살아가지만, 타인의 기억을 경청함으로써 관계의 균열을 조금씩 메워갈 수 있다는 메시지가 담겨 있다.

결국 이 영화는 “진실이란 무엇인가”라는 존재론적 질문을 정면에서 다루기보다, “누군가의 기억을 어떻게 존중할 것인가”라는 윤리적 물음으로 우리를 이끈다. 그것은 단지 파비안느와 뤼미르의 이야기가 아니라, 세대를 초월한 모든 가족이 겪는 보편적인 질문이기도 하다.


6. 결론 : 진실을 말하는 일보다, 진심을 들여다보는 용기에 대하여

고레에다 히로카즈는 <파비안느에 관한 진실>을 통해 언어와 문화의 장벽을 넘어, 인간관계의 본질을 탐색하는 데 성공한다. 일본인이 프랑스 배우를 주인공으로 한 프랑스 영화를 연출했다는 점에서 이 영화는 실험적인 성격을 띠지만, 정작 그 안에 담긴 감정의 결은 놀라울 만큼 섬세하고 보편적이다.

이 영화의 가장 큰 미덕은 감정을 폭발시키지 않으면서도, 등장인물의 내면을 차근차근 열어 보인다는 점이다. 파비안느는 결코 반성하거나 눈물을 흘리는 전형적인 방식으로 변화하지 않는다. 그러나 그녀가 뤼미르의 목소리를 듣고, 스스로를 돌아보려는 작은 시도는 그 자체로 충분히 큰 의미를 지닌다. 그것은 거창한 화해가 아니라, 서로의 시선에서 조금 물러서 보는 일, 즉 ‘서로의 진실을 인정하는 시간’이기 때문이다.

<파비안느에 관한 진실>은 우리에게 말한다. 모든 가족은 기억의 모순 속에서 살아가고, 그 기억은 서로 다르기 때문에 때때로 상처가 되기도 한다. 그러나 누군가의 입장이 되어 다시 이야기를 들어볼 때, 우리는 그 상처를 다독일 수 있는 가능성을 얻는다. 영화는 그러한 작은 가능성에 대한 믿음을 품고 있으며, 그것이야말로 고레에다 히로카즈가 꾸준히 보여온 인간에 대한 깊은 애정이자, 삶을 향한 조용한 시선이다.


7. 자료 출처

  • 영화 공식 홈페이지 및 배급사 정보 (Wild Bunch, 2019)
  • IMDb 영화 데이터베이스
  • 고레에다 히로카즈 감독 인터뷰 (Cineuropa, 2019)
  • 베니스국제영화제 관련 보도 자료 (La Biennale di Venezia, 2019)
  • 영화평론지 <Cahiers du Cinéma>, <Sight & Sound> 리뷰 발췌 및 재해석